개관 10주년 기념 전시 《환상의 나래를 펴다 _ 샤갈 재조명》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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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박춘순
2013년 5월 11일 개관한 해든뮤지움이 올해로 개관 1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에 이제까지 해든뮤지움의 전시 중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마르크 샤갈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전시를 준비하였습니다.
‘에콜 드 파리’, 파리에 거주하던 이방인 예술가들을 일컫던 말입니다. 몽환적 색채와 자유로운 화면 구성으로 표현했던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 그의 작품에서는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의 정신뿐만 아니라 러시아 예술 전통과 유대 신비주의의 깊이까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샤갈은 떠나온 고향 비텝스크, 제2의 고향이 되어 준 파리, 노년의 삶을 마무리했던 생 폴 드방스, 그리고 그가 사랑한 지중해의 따스한 풍경을 배경으로 본인의 가족, 연인 등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과 종교와 신화, 문학의 소재를 아우르며 인간 보편의 감성을 아름다운 색채와 환상적인 화면 구성으로 신비스럽게 표현해냅니다.
페인팅, 드로잉, 석판화, 에칭, 일러스트 북 등 원화 4점과 오리지널 판화 54여점, 희귀본 삽화집 2권으로 구성된 《환상의 나래를 펴다 - 샤갈 재조명》전에서는 삶을 사랑한 예술가 샤갈의 따스한 시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찬란한 봄빛 속에서 아름답게 펼쳐지는 샤갈의 세상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몽환적 색채와 자유로운 화면 구성으로 세기를 넘도록 사랑받고 있는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예술세계는 20세기 초 파리 모더니즘 미술의 정수뿐만 아니라 러시아 예술 전통과 유대 신비주의의 깊이를 담고 탄생했다. 샤갈이 태어난 도시 비텝스크에는 유대 신비주의 전통 하시디즘이 계승되고 있었으며 샤갈의 집안은 그 안에서도 신앙이 깊은 축이었다. 샤갈의 삶에서 근간이 되어온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작업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샤갈이 파리에 도착한 1910년, 입체파와 야수파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샤갈은 야수파의 표현에서 색채의 내밀한 역동을 발견했고, 입체파에서는 장면의 구성 방식을 익혔다. 하지만 파리의 표현 양식은 그에게 좋은 자극은 되었으나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샤갈의 비현실적 공간 구성은 러시아의 슬라브 민족의 예술적 특징과도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서유럽 르네상스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발달한 동유럽 비잔틴 양식의 성상화의 특징인 상대적 복수 시점과 역원근법의 요소는 입체파와 무관하게 이전부터 전해오는 것이었다. 샤갈의 그림에서는 중력과 무관하게 인물과 사물이 존재하며 과거와 현재의 것들이 혼재하고 다른 공간에 속한 존재들은 한 공간을 점유한다. 물리적 시공간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었다.
샤갈은 생애에 걸쳐 같은 소재를 반복해서 그리곤 했으며 특히 어린 시절의 기억은 빠지지 않는 모티브가 되었다. 물고기는 청어 상점에서 고된 일을 하시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지붕 위 바이올린 연주자의 모습은 지붕 위에서 당근을 드시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그 외에도 비텝스크의 눈 쌓인 거리, 나무집, 서커스처럼 많은 소재들이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흘러나와 그의 그림 이곳저곳에 편재하게 되었다. 에펠탑이 등장하는 장면처럼 파리의 풍경에서조차 고향의 기억은 중첩되어 나타났다. 일상적인 사물, 동물, 인물들은 표현적인 색채로 덧입혀져 기억은 꿈결처럼 느껴지면서도 흐릿하기보다 더욱 생생했다. 하늘을 나는 사람, 작은 집 지붕에서 춤추는 거대한 사람, 투명한 자궁 안에 배태하고 있는 가축처럼 그는 일상적 표현 안에서 기괴한 모티브들을 발전시켜갔다. 평범한 소재를 자유롭게 배치하고 상징적 색채를 입혀내는 샤갈의 표현 방식은 양식적으로는 파리의 모더니즘 미술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일상에서 신과의 접점을 발견하고자 하는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전통과 맞닿은 표현 양식이었다. 시인 아폴리네르가 샤갈의 파리 작업실에서 ‘초자연적(surnaturel)’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초현실주의가 탄생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외재적 세계에 대한 형식적 인식을 가장 내밀하게 표현할 수 있던 샤갈의 회화 방식은 이후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이후 초현실주의 그룹의 합류 요청을 거절했고, 어떤 동인에 가입하기보다 자신의 색채를 찾는 것에 평생을 바쳤다.
샤갈은 판화, 세라믹, 과슈, 삽화, 스테인드글라스, 무대미술과 타피스트리 등 다양한 매체를 섭렵했고, 모든 분야에서 괄목할 성과를 이뤘다. 특히 화상 볼라르가 구약성서의 삽화를 의뢰한 것을 계기로 샤갈은 판화 기법을 열정적으로 실험했으며, 신학, 신화, 도상 연구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있어 종교와 신화는 민족 이념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인간 보편의 감성을 다루기 위한 소재로 사용되었다. 나치 폭정시기에는 신약 속의 십자가처형에서 유태인으로서 느끼는 슬픔과 고통을 발견하고 표현하기도 했다. 일상에서 신비를 표현하듯 신화와 고전 문학에서 찾은 소재는 일상의 표현과 함께 사용되었다. 모더니즘 미술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샤갈의 예술 세계는 20세기 초반 파리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모더니즘 미술 양식과 그가 자란 가족과 마을 공동체에 대한 사적인 기억이 어우러져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어떤 이념과 사상, 종교, 어떤 미술사조도 교조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자유로운 색채와 조형을 통해 일상으로부터 세상의 신비를 드러낼 수 있었기에 샤갈은 20세기 가장 위대했던 모더니스트로 남게 되었다.
다프니스와 클로에
Daphnis and Chloe
‘세상의 모든 러브스토리의 기원’이라 불리는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레스보스 섬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 시인 롱고스(Longus, AD 2-3세기)의 작품이다.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프롤로그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나는 어느 날 레스보스 섬에서 사냥을 하다 숲 속에서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바로 사랑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었다. 숲은 수많은 나무, 꽃, 물들로 이미 아름다웠다……중략……나는 다른 것도 보았는데, 그것은 사랑의 장면이었다. 나는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이 그림이 표현한 이야기를 글로 옮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롱고스가 쓴 이야기가 바로 다프니스와 클로에에 대한 것이다. 레스보스 섬의 양치기가 주워 기른 아이들이 양치기와 염소치기로 자라 서로 사랑에 빠지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이겨내 각자의 친부모를 만나고 사랑의 결실을 이루게 된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샤갈은 롱고스의 문학작품을 소재로 <다프니스와 클로에> 석판화(lithography) 연작을 제작했다. 43개의 장면로 이루어진 이 연작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4년간 진행되어 절정기 샤갈의 작품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샤갈은 라벨의 발레곡으로 파리 오페라에서 공연된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이미 석판화 작업을 하고 있던 그에게 이 작업은 동일선 상의 작업으로서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훨씬 용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샤갈은 이 시리즈의 작품을 그리기 위하여 직접 그리스를 방문하여 자신이 책에서 받은 인상을 비교했다. 롱고스의 소설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그림의 색감과 분위기도 변화하고 있으며 연작의 배경으로 그리스의 풍경도 등장하지만 샤갈이 방문했던 지중해, 팔레스타인, 프랑스 코트다쥐르 등 여러 장소도 무대가 되고 있다.
성서 이야기
The Bible Story
나는 성서를 읽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꿈꿨다. 어린 시절부터 성서는 나를 매료시켰고 나의 시의 가장 훌륭한 원천이었으며, 여전히 그렇게 보인다. - 마르크 샤갈
샤갈이 태어난 비텝스크는 그 인구 구성의 절반이 유태인으로 유대 신비주의가 오랜 기간 이어져 오고 있었으며, 특히 샤갈의 조부가 랍비로 지냈던 만큼 그의 집안은 더욱 경건한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성서 삽화 제작은 1930년 파리의 화상이자 출판인이었던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제안에서 시작되었으나, 샤갈은 이 주제에 깊이 천착하며 볼라르의 사후인 1956년에야 105점의 동판화집이 출간되고, 1960년에는 해든뮤지움이 소장한 『성서를 위한 드로잉』이라는 제목으로 석판화집이 제작되었다.
성장과정에 배어있던 구약이 그에게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던 것은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유태인들이 배척하던 신약마저도 깊이 탐구하고 화폭에 담았던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온 세계, 일상에서 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던 샤갈에게 신약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비추어 볼 창과 거울이 되었고 이로써 샤갈은 개인적이며 민족적일 수 있던 고통을 인류의 아픔으로 치환하여 표현할 수 있었다.
샤갈은 성서의 배경인 팔레스타인을 여행을 하면서 풍광과 분위기를 익히고 많은 과슈를 제작했는데 그 중 일부가 판화 작업의 기초가 되었다. 성서는 오랜 세월 예술가들이 가장 많이 다루던 소재였으나 샤갈처럼 체계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관습에서 벗어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해석으로 다룬 작가는 없었다.
신들의 땅 위에서
In the land of Gods
샤갈과 두 번째 부인 발렌티나 브로스키(일명 바바)는 그리스 아테네, 델피, 포로스 섬 일대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리스의 밝고 열정적인 분위기는 샤갈에게 새로운 영감이 되었고 그의 후기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리스 여행에서 마주한 그리스의 건축, 조각, 풍경은 샤갈이 평소에도 좋아하던 고대 시들과 문학작품에 대한 열정과 합쳐져 <신들의 땅 위에서> 시리즈를 제작하는 결과를 낳았다. <신들의 땅 위에서>는 12점의 다색석판화로 이루어졌으며 각각의 그림은 사포, 롱고스 테오크리토스,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작가가 쓴 시와 함께 표현되었다. 샤갈은 각 장면에서 시의 내용을 서사적으로 묘사하는 대신에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꽃이 만발한 지중해의 정원을 노니는 연인과 사람들의 모습을 이상향으로 그려내고 있다.
샤갈이 그리스로 향할 때 그는 삶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샤갈이 다시 살리고자 하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있는 꿈과 기억이다…… 샤갈은 신의 춤을 실질적이고 보일 수 있도록 만든다. 그는 인간 세상은 버려진 것도, 창조의 거대함 속에 아무 의미 없이 방황하는 하나의 공도 아니며, 모든 곳에 가득한 은총의 일부라고 말한다.
- 로베르 마르토
『신들의 땅 위에서』 서문 中
서커스
The Circus
1920년부터 서커스는 샤갈의 작품에 계속해서 등장했던 모티브였다. 샤갈이 비텝스크에서 보았던 유랑하는 곡예사들은 유년시절 샤갈에게 잊혀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겼고, 춤, 광대, 동물의 움직임은 샤갈 인생을 통틀어 매혹과 환희의 원천이었다. 서커스 공연단의 가벼운 몸짓은 샤갈에게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켰고